자유투

240416 케니라는 섬

원래대로라면 케니에서의 일정은 무려 4박이었다. 3박을 할까 4박을 할까 무지 고민하다가 결국 4박을 결정했기에 그 4박이 더 애틋했다. 그러나 3박으로 변경된 이 상황에, 나는 순간순간이 너무 아까워서 노트북을 켰다. 일정 동안 하루를 약 34시간 정도로는 써줘야 덜 속상할 것이다.

케니에서의 4박 일정은 대부분의 지인이 알고 있을 정도로 최근 내게 가장 중요한 계획이었다. 4박 동안 읽을 책들과 먹을 간편식들, 찻잎과 휴대용 다구까지 부지런히 챙겨왔다. 오랜만에 온 케니는 호텔이 아니라 스테이로 바뀌어있었고, 이용규칙이 변경되고 제공되던 것들이 사라졌다. 그래도 괜찮았다. 나는 입실 키를 담았던 종이를 책갈피로 소중하게 쓸 정도로 케니를 좋아했기 때문이다.

체크인 후 방에 들어와 잠깐 한숨 돌리려는데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와있었다. 나보고 19일 몇 시까지 어디로 어떻게 오라는 누군가의 문자였다. 잘못 온 문자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휴대폰을 내려놨다가 문득 '설마...'하는 마음이 들었다. 바로 엄마에게 전화했다.

자세하게 설명하긴 어렵고, 상황은 이랬다. 엄마가 나를 꼭 데려가야만 하는 어떤 약속을 내게 공유하지 않은 것이다. 엄마는 내 4박 여행 일정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. 예약 직후 말했고, 혹시 잊을까 봐 가족 채팅방에도 공유했으며, 출발 전날 짐을 쌀 때도 함께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. 하지만 엄마는 내 여행 일정 내에 그 중요한 약속이 있다는 걸 잊었고, 엄마는 결국 '그날 제주시로 왔다가 가라'고 했다.

나에게 케니에서의 일정은 아주 일상적인 곳을 떠나 무인도 같은 섬에서 생활해 보는 시간이었다. 그 섬에서 모처럼 고독함을 잔뜩 느껴보고 싶었다. 매일 조금씩 설렘을 모으며 기다렸는데, 그 설렘이 체크인 1시간 만에 와장창! 깨졌다. 4박으로 마침내 결정하며 추가된 그 하루는 모든 여행 일정 중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. 짧지만 짧지 않은 며칠간 무엇을 읽었고, 무엇을 먹었고, 무엇을 보았고, 무엇을 생각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한 그 금요일이었단 말이다 ㅜㅜ

'육지에 간 것도 아닌데, 왜 못 오냐'는 말에 울분이 치밀었다. 자세히 들어보니 여러 군데를 들러야 해서 몇 시간 안에 끝날 일도 아니었다. 아침에 제주시로 갔다가 그날 밤에 케니에 왔다가, 그다음 날 아침에 바로 체크아웃이라고 생각하니 케니에 돌아올 용기가 나지 않았다. 결국 마지막 1박을 취소했다.

억울해서 눈물이 다 났지만, 어떤 안 좋은 사건으로 모든 일정을 다 망치던 지난 날의 나를 곱씹었다. 그랬더니 순간 차분해졌다. 오늘 같은 날이 앞으로 수만 번은 더 있지 않을까. 엄마만이 아니라 내가 예상치 못한 어떤 외부의 영향으로, 누군가의 실수로 나는 언제든 가로막힐 수 있다. 내가 하나도 잘못하지 않아도, 내가 최선을 다해도 나는 의도되지 않은 무언가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.

훌륭한 시작이었다. 도착하자마자 날씨도 좋았고, 운전하고 오는 길에 든 생각들도 참 긍정적이었다. 일까지 어느 정도 잘 마무리하고 왔으니 내 상황은 거의 흠잡을 데가 없었다.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소중한 나의 휴식에 금이 갔다. 그래도 이번 일은 엄마한테 짜증이라도 내고, 누군가에게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다. 어찌 됐든 하루 일찍 돌아간다고 인생 무너지는 건 아니니까. 나를 제외한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며, 이 정도 일은 아주 '순한 맛'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나아졌다.

피차 기분만 상해서 득 될 게 뭐가 있나 싶어, 평소 말투로 다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금요일에 일찍 돌아가겠다고 말했다. 엄마가 내 눈치를 보지 않아 좋았고, 나도 다 풀어버린 마당에 갑자기 욱하기 민망해졌으니 차라리 좋았다.

그렇게 기분을 푸니 여행할 맛이 조금 살아났다. 줄어버린 일정은 여전히 아쉽지만 그래서 더 알차게 쓰려고 노력했다. 아참, 부분 환불은 절대 안 될 것 같았는데 진짜 짱 친절하신 상담원께서 노력해 주신 덕에 1박을 환불받았다. 딴 얘기지만, 너무 오랜만에 좋은 상담원을 만나서 그런지 감사가 쉽게 나오지 않아 당황했다. 엄청 고장 난 상태로 버벅이며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는데, 그분도 버벅이며 고장 나서 그나마 다행이었다.

첫날 쓰던 글이 이제야 끝나다니 참나! 여튼 3박이라도 살려서 다행이야~!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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Comments
  1. 케니아일랜드 — Apr 17, 2024:

    하루가 줄어 어쩌면 더 소중해진 3박! 게다가 언제든 가로막힐 수 있다는 감각과 그것을 스스로 잘 해결할 수 있다는 경험을 한 것만으로도 이미 성공한 여행 같네요! 귀한 잠 주무시길 !

  2. 굉가리 — Apr 19, 2024:

    열차표를 사기 위해 기다리다가, 앞 사람이 죙일 컴플레인을 하는 바람에 놓쳐버릴 뻔했던 기차를 역무원 덕에 아슬아슬하게 탑승했던 일본 여행이 떠오르네여.. 여행 중 가장 증오했던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여행의 맛이 살았던 경험이였어요.